한글은 왜 이렇게 잘 들릴까 — 소리를 그린 문자
표음문자 중에서도 특이한 한글.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떴고, 모음은 하늘·땅·사람이 만든 기호였습니다. "Bㅏ보" 같은 현상이 왜 가능한지도 함께.
한국의 중학생은 종이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Bㅏ보야." 그리고 옆의 친구는 웃으며 "바보"라고 읽습니다. 라틴 문자 B와 한글 ㅂ이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이 장난이 가능한 이유는, 한글이 세계의 다른 문자들과 조금 다르게 설계됐기 때문입니다.
표음문자 중에서도 특이한 설계
세상의 문자는 크게 세 갈래입니다. 뜻을 그린 표의문자(한자), 음절을 적은 음절문자(일본의 가나), 자음과 모음을 분리한 표음문자(알파벳·한글). 한글은 세 번째에 속하지만, 그 안에서도 특이한 위치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알파벳은 "어쩌다 만들어졌고, 오래 쓰이다 보니 지금처럼 남았다"에 가깝습니다. 라틴 알파벳은 페니키아 문자에서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흘러왔고, 그 과정의 누적이 오늘의 모양입니다. 한글은 다릅니다. 1443년, 단 한 사람의 주도로, 한 번에 설계되어, 1446년에 공표되었습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작품입니다.
자음 — 발음기관을 그린 문자
한글 자음의 설계 원리를 적은 책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 이 책은 1940년에 안동에서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500년 가까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해례본을 펴 보면 놀라운 문장이 나옵니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
- ㄱ —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 ㄴ —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 ㅁ — 입술의 모양
- ㅅ — 이의 모양
- ㅇ — 목구멍의 동그란 모양
자음을 천천히 발음하면서 거울을 보면, 정말로 그 모양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문자를 만든 게 아니라, 소리를 그린 것입니다. 이런 발상으로 설계된 문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음 — 하늘·땅·사람
모음은 더 철학적입니다. 세 개의 기본 기호만 외우면 됩니다.
- · (하늘) — 지금은 쓰지 않지만, 옛 한글에 있던 점
- ㅡ (땅) — 평평한 지면
- ㅣ (사람) — 서 있는 사람
이 세 기호를 조합하면 ㅏ, ㅓ, ㅗ, ㅜ, ㅑ, ㅕ, ㅛ, ㅠ가 만들어집니다. 하늘과 사람이 만나면 ㅏ, 땅 위에 하늘이 놓이면 ㅗ. 동양 철학의 천지인(天地人) 삼재 사상이 그대로 문자가 되었습니다.
"Bㅏ보"가 가능한 이유
여기서 처음의 장난으로 돌아갑니다. 한국인이 "Bㅏ보"를 "바보"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라틴 B와 한글 ㅂ이 둘 다 "양 입술을 붙였다 떼는 소리(양순 파열음)"라는 같은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은 자음을 기호가 아니라 소리의 기능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B가 ㅂ의 자리에 끼어들어도 문법이 깨지지 않습니다.
라틴 알파벳을 한글 자음 자리에 넣어 보면 대개 맞습니다. D=ㄷ, M=ㅁ, N=ㄴ, S=ㅅ, K=ㅋ. 한국인이 외국어 단어를 한글로 "음역"할 때 유달리 정확한 이유도 같습니다. 소리를 그린 문자이기 때문에, 소리의 체계가 같으면 옮기기 쉽습니다.
문자로 과학을 한 민족
한글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자주 반복됩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한글은 과학적으로 설계된 드문 문자입니다. 그리고 그 설계 의도는 해례본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이 글자를 만드노라.
15세기의 왕이 백성의 입장에서 설계한 문자. 발음기관의 모양을 그려 넣고, 우주의 구조를 모음에 담은 문자. 이 문자를 아직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저는 가끔 믿기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