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일본어에서 왔다 — 드라마가 이 설정을 반복하는 이유
재벌(財閥)은 일본 '자이바츠'에서 온 말이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1989년 chaebol로 등재됐다. 정의에 가족 소유가 명시돼 있고,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과는 정의가 다르다.
한국 드라마를 몇 편만 봐도 재벌 캐릭터를 만난다. 재벌 2세, 재벌가 상속 다툼, 재벌과 평범한 사람의 로맨스.
그런데 이 단어는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수출됐다. 영어 자막도 chaebol 이라고 쓰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1989년에 등재돼 있다.
번역이 안 된 이유가 있다. 대응하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구조를 부르는 이름이 한국에서 따로 생겼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기
| 항목 | 내용 |
|---|---|
| 한자 | 財閥 — 재물 재 + 문벌 벌 |
| 어원 | 일본어 자이바츠(財閥) — 1차 대전 전 미쓰이·미쓰비시·야스다·스미토모를 부르던 말 |
| 영어사전 등재 | 옥스퍼드 영어사전 1989년 (chaebol) |
| 사전 정의 | "대한민국의 대규모 기업집단" — 가족 소유가 특징으로 명시 |
| 법률 용어 | 공정거래법은 '재벌'이 아니라 '기업집단' 을 쓴다 |
| 법상 정의 | "동일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 — 가족 소유일 필요는 없다 |
| 제도 도입 | 1986년 공정거래법 2차 개정(대규모기업집단 지정제도 등) |
일본어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 주는 것
재벌은 일본의 자이바츠(財閥) 에서 온 말이다. 한자가 같다. 1차 세계대전 전 일본의 대규모 기업집단 — 미쓰이, 미쓰비시, 야스다, 스미토모 — 을 그렇게 불렀다.
이 유래가 알려 주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 구조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가족이 지배하는 다각화된 기업집단은 일본에도 있었고, 지금 동남아 여러 나라에도 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이해할 때 자기 나라의 가족 기업집단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둘째, 그런데도 이름은 한국 것으로 굳었다. 일본의 자이바츠는 2차 대전 후 해체됐고 지금은 다른 형태(케이레츠)로 이야기된다. 반면 한국의 재벌은 계속 커졌고, 그 결과 영어 사전에 들어간 것은 chaebol 쪽이다.
'재벌'과 '기업집단'은 다른 말이다
한국 뉴스를 읽다 보면 두 단어가 섞여 나온다. 구분해 두면 기사가 정확히 읽힌다.
재벌은 일상어이고 언론 용어다. 가족이 지배한다는 뜻이 핵심에 있다. 옥스퍼드 사전이 굳이 가족 소유를 정의에 넣은 것도 그래서다.
기업집단은 법률 용어다. 공정거래법은 "동일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 의 묶음을 기업집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동일인'은 사람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다 — 즉 가족 소유가 아니어도 기업집단이 된다.
이 구분이 생긴 배경에는 제도가 있다. 한국은 1986년 공정거래법 2차 개정에서 지주회사 설립금지,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제도, 상호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함께 도입했다. 규제하려면 먼저 정의해야 했고, 정의하려면 '가족'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뉴스에서 "○○그룹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는 문장은 가족 회사라는 뜻이 아니라 자산 규모가 기준을 넘었다는 뜻이다.
드라마가 이 설정을 반복하는 세 가지 이유
작가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이야기 구조상 유리한 점이 분명하다.
첫째, 갈등이 설정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상속 다툼, 정략결혼, 경영권 분쟁, 형제 간 경쟁. 없는 갈등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
둘째, 현대 배경에서 신분 차이를 쓸 수 있다. 왕족이 없는 사회에서 재벌은 계급 차이를 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치다. 한국 로맨스의 상당수가 재벌과 평범한 사람의 만남인 이유가 여기 있다 — 사극의 신분 차이를 현대로 옮긴 자리다.
셋째, 주인공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수사물에서 주인공이 절차에 막히는 순간, 돈과 인맥으로 그것을 뚫게 해 주는 장치다. 재벌 2세가 형사인 설정이 반복되는 것도 특권과 공권력을 한 사람 안에 넣으면 이야기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반복은 비판도 받는다. 현실의 구조는 드라마보다 훨씬 복잡하고, 로맨스의 배경으로 소비되면서 실제 사회 문제가 낭만화된다는 지적이다. 실제 상속·승계는 지분 구조와 세금 문제로 몇 년씩 이어지는 일인데, 드라마는 그것을 유언장 한 장과 이사회 한 번으로 줄인다.
이 단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외국 독자가 가장 놓치기 쉬운 점이 이것이다. 한국에서 '재벌'은 칭찬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평가와, 정경유착·불투명한 승계·일감 몰아주기라는 비판이 한 단어 안에 같이 들어 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온도가 크게 달라진다. 기업이 스스로를 '재벌'이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고, 공식 문서는 '그룹'이나 '기업집단'을 쓴다.
드라마 속 재벌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그려지면서도 동시에 자주 악역인 것이 이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시청자는 그 인물의 재력을 즐기면서 그 인물이 벌받기를 바란다 — 앞 글에서 다룬 사이다가 가장 자주 터지는 자리가 바로 재벌 캐릭터 앞이다.
그래서 당신 나라에서는
| 상황 | 알아 둘 것 | 어떻게 할 것인가 |
|---|---|---|
| 자막에 chaebol 이 그대로 나올 때 | 번역 실패가 아니라 사전에 있는 영어 단어다 | 자기 나라의 가족 기업집단을 떠올리면 구조가 바로 잡힌다 |
| 한국 뉴스를 읽을 때 | '재벌'(일상어)과 '기업집단'(법률어)은 다른 말 | "대기업집단 지정"은 가족 회사라는 뜻이 아니라 자산 기준을 넘었다는 뜻 |
| 이 단어를 쓸 때 | 중립적이지 않고 비판 뉘앙스가 강하다 | 특정 기업을 가리켜 쓸 때 조심할 것. 한국인은 이 단어의 온도를 안다 |
| 드라마 설정으로 볼 때 | 신분 차이를 현대로 옮긴 장치다 | 사극의 왕족·양반 설정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보면 이야기 구조가 읽힌다 |
| 자기 나라와 비교할 때 | 구조는 비슷해도 이름이 따로 생긴 것은 한국 | 그래서 특별한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부르는 말이 수출됐다는 사실이다 |
동남아 독자에게 이 비교는 특히 가깝다. 여러 나라에 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 있고, 여러 산업에 걸쳐 있으며, 경영이 대물림되고, 그 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드라마 속 재벌가를 볼 때 자기 나라의 그 집단을 대입하면 인물 관계가 훨씬 빨리 이해된다 — 사돈 관계, 계열사 배치, 경영 수업이라는 이름의 후계 훈련까지.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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